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무라 카츠야 (문단 편집) == 여담 == * 현재 일본 프로야구에서 [[퀵모션]]이라고 하는 개념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난카이 시절 감독에 재임하던 당시 리그 베이스를 탈탈 털던 [[후쿠모토 유타카]]를 막기위한 대책으로 당시 투구폼이 작은데다가 셋 포지션에 능숙했던 [[호리우치 츠네오]]를 보고 만들어 낸 것 이였는데 캐치까지 1.1초 2루로 송구까지 1.8초 도합 3초 이내면 육상선수가 와도 아웃 시킬 수 있다는 지론[* 상당히 일리가 있는 얘기이긴 하다. 송구가 아무리 빨라봐야 시간상으로는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기에 되도록이면 공을 던질 때 까지의 준비시간을 줄이는게 투수와 포수 모두에게 이득이지만 메이저리그의 경우 도루를 그렇게 많이 하는 주자도 없는데다가 타자를 우선적으로 잡고 본다는 시각이 있어서 퀵모션을 안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며 드물게 아예 안가르치는 경우도 있다.]으로 퀵 모션이라고 하는 동작을 개발해냈다.[* 원래 '세트 포지션에서 투구폼을 더 줄인다'라는 발상은 [[미하라 오사무]] 감독이 이미 주장하긴 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었다.] 당시 투수진은 주자를 못 잡는건 포수 탓 이라고 굉장히 반발이 심했으나 포수 겸 감독이였던 노무라는 권력으로 찍어눌렀으며 --까라면 까-- 퀵모션을 최초로 도입한 난카이 호크스는 1973년 그 해 [[퍼시픽리그]] 우승을 거머쥐었다. 후쿠모토 유타카와 노무라 카츠야 시대 이후부터 일본 주자들은 투수의 [[쿠세]]를 찾아 어떻게든 베이스 하나 더 가려고 기를 쓰게 되었고 투수와 포수는 어떻게든 준비시간을 줄이고 쿠세를 없애 그 주자들을 잡는 방향으로 발전하여 현재의 일본야구의 기반이 되는 플레이를 하게 되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일본 야구 역사에서 꽤 굵직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 현역 시절에 포구가 살짝 빠진 틈을 타 몰래 2루로 가려던 주자를 발견하자, '''자신이 직접 2루까지 달려가서''' [[아웃]]시키는 기행을 선보인 적도 있다. [[https://youtu.be/7MNIXjSAP04|8분 9초부터]] 주자가 노무라가 자길 잡으려고 뛰는 걸 미처 못 본(...) [[본헤드 플레이]]를 저지른 것. ~~어느 누가 [[포수]]가 2루로 가는 주자를 뛰어가서 잡는다는 상상을 하겠냐만~~ * 야쿠르트 감독 시절에 음반을 발매 한 적이 있다. 장르는 [[엔카]]. 한신 감독시절 재발매 되었으며 이후 2009년 라쿠텐에서 앨범을 또 한장 발매하는데 가사를 부인이 써 주었다고 한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어렸을 때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을 가지는 것이 장래희망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제일 처음으로 가진 장래희망이 [[미소라 히바리]]의 영향을 받아 가수였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고음을 낼 수가 없어서 가수의 꿈을 포기하고 선택한 것이 야구선수라고 한다. 결국 야구로 대성하고 음반까지 냈으니 어찌보면 소시적의 꿈을 성취했다고도 할 수 있다. * 부인이 막장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공처가로서 가계부 관리는 부인이 하고 본인은 [[신용카드]]를 사용하는데 신용카드의 결제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해서 "사인을 할 뿐 인데 어째서 물건을 주는걸까?"라고 고민을 하긴 했지만 --일단 주니까 쓰자-- 걱정없이 쓰다가 신용카드 명세서가 부인에게 전달이 된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나중에 부인이 추궁하자 "나를 미행하는거야? 징그러운 여자네"라며 부인과 부부싸움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 상술했듯 다소 불명예스럽게 [[난카이 호크스]]를 떠난 뒤 죽을 때까지 난카이와는 절연하다시피 했는데,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다. 2009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를 사상 첫 A클래스로 이끌었음에도 프런트가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해임을 결정하고 대대적으로 퇴임 소식을 발표해버렸다. 이에 팬들에게서 반발이 일자 [[궁여지책]]으로 노무라의 등번호인 19번을 [[영구결번/스포츠|영구결번]]시킨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에 '''"내 차라리 난카이에서 영구결번을 받으면 받았지, 라쿠텐에서 영구결번을 왜 받냐? 라쿠텐 따위에 무슨 자부심을 느끼라고?"'''라는 발언을 날리며 프런트를 비판했다. 난카이랑은 사이도 험악한 데다 이미 구단이 팔렸기 때문에 호크스에서 영구결번을 받는다면 [[소프트뱅크]]에서 해줘야 되는데, 이미 팀이 [[후쿠오카]]로 떠난지 30년이 넘어서 예전 난카이 색채가 완전히 없어졌기에 이제와서 영구결번으로 지정해도 후쿠오카의 팬들에게는 뭔가 와닿지 않을 것이 자명한 사실이었다.[* 당장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가 [[이나오 카즈히사]]의 등번호인 24번을 [[영구결번/스포츠|영구결번]]으로 지정할 때도 [[후쿠오카]] 시절 선수에게 [[사이타마]] 구단이 영구결번을 줘도 되는 거냐며 반대 의견이 나온 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표현을 쓸 정도로 당시 라쿠텐 프런트의 막장행위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는 점과, 그리고 난카이 구단에 대해서도 이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라는 점을 엿 볼수 있다. 결국 라쿠텐의 19번은 영구결번으로 지정하지 않은 채 비워두다 2017년부터 신인 [[투수]] 후지히라 쇼마에게 주어졌으나 2021시즌 종료 후 후지히라가 등번호를 46번으로 바꾸며 다시 결번이 되었다. * 호크스의 등번호 19번은 노무라가 떠난 뒤 한동안 결번 상태였다가 1981년 신인 [[투수]] 야마우치 타카노리[* 난카이 말기의 에이스 [[선발 투수]]로써 1992년 은퇴 때까지 통산 100승 125패를 기록했으며, 데뷔 초엔 동성의 [[투수]] 야마우치 카즈히로, 야마우치 신이치와 함께 일명 '''야마우치 트리오'''라 불리는 선발진을 형성하기도 했다.]에게 주어진 것을 시작으로 노무라가 감독을 맡았던 [[사회인야구]]팀 시닥스 출신의 [[모리후쿠 마사히코]] 등 [[투수]] 전용 등번호로 계승되다가[* 여담으로 1993~1996년까지 이 등번호를 달고 있던 오오코시 모토이는 성적 부진 때문에 입단 5년차인 1997년에 등번호를 51번으로 바꾸고 [[외야수]]로 전향했으나, 타자 전향 후에도 이렇다할 성적은 내지 못한 채 2003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2020년 [[카이 타쿠야]]가 달면서 다시 호크스 주전포수의 등번호로 부활했다. * 영구결번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면 본인의 등번호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10이라는 숫자에 대한 집착이 있었던 것 같다. 신인 시절 첫 두해를 제외하면 감독시저까지 평생 달았던 번호는 각 자리의 숫자를 합하면 10이 되는 숫자였다. 현역시절과 라쿠텐 감독시절은 19, 야쿠르트 감독시절은 73, 한신 감독 시절에는 82번을 달았었다. ~~정작 본인의 야구인생에서 등번호 10을 단 적은 한번도 없다.~~ * 현역시절 소문난 골초였다. 하루에 3~4갑 정도를 아무렇지않게 피웠다는 듯. 하지만 야쿠르트 감독 재임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말년에는 금연을 하였다. * 라이벌들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도쿄]]의 [[긴자]], [[오사카]]의 [[기타신치역|기타신치]] 술집들을 활용했다고 한다. 노무라는 (관찰대상) 선수가 누구와 사랑에 빠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타석에서 그 선수에게 말하면 상대방은 놀라고 집중력을 잃었다고 한다. * 노무라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생각의 과정이다. 노무라가 말하는 생각의 과정이란 분석 - 관찰 - 인사이트 - 판단 - 기억의 사이클이다. 데이터는 어디까지나 분석을 위한 하나의 재료에 불과하다. 거기에서 상황을 관찰하고 심리 상태까지 통찰한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처음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결과를 기억하고 다음으로 연결한다. 생각의 과정을 선수 한 사람 한 사람이 이해하고 실천함으로써 팀은 강한 조직으로 변해간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 근데 위의 방법은 야쿠르트에서는 성공했지만 한신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왜 성공과 실패로 엇갈렸는지. 노무라는 자신의 생각을 주입시키기 위해 스프링캠프에서 매일 저녁 미팅을 가졌다. 야쿠르트에서는 성공을 거두었다. 선수들은 처음에 "이런 이야기가 야구의 실전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의아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지만 점차 노무라의 생각을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 이걸 벤치마킹한 게 김성근이다. 김성근도 sk시절 선수들에게 이런 식의 미팅을 매일 가졌다. 노무라 쓴 id노트를 선수들에게 보게 하고 이후 김성근이랑 노무라가 대담을 한 적도 있고 김성근 스스로가 노무라의 책을 보고 야구인생이 바뀌었다고 할정도 김성근이 소위 자기 스스로 데이터야구를 한다고 하는데 이 데이터 야구의 원조가 노무라의 야쿠르트 감독 시절 주창한 id야구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1/18/2010011801597.html] 물론 한신 감독 시절에도 미팅을 가졌다. 그러나 선수들의 해석 방법이 달랐다. 야쿠르트 감독 시절에는 화이트 보드에 써가면서 설명하고 선수들 자신이 스스로 메모장에 필기하는 방법이었다면, 한신 시대는 텍스트를 프린트물로 선수들에게 나눠졌던게 화근이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한신 선수들이 노무라의 생각을 취하지 않고 흘려 들었기 때문에 생각을 침투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야쿠르트에는 후루타 아쓰야라는 중심을 확실히 잡아주는 선수가 있었지만 한신에는 그런 선수가 없었던 것이 실패 요인이다. 애초에 강의 방법이 화이트보드든 프린트물이든 당시 한신의 분위기는 노무라의 교육이 먹혀들어가지 않는 막장분위기였는데 선수들은 스프링캠프 때부터 훈련 끝나고 나면 저녁에 후원회를 자처하는 자신의 개인 스폰서들[* 이를 일본 속어로 '다니마치'라고 하는데 원래 스모에서 나온 말이다. [[KBO 리그]]에서도 선수 팬클럽 문화가 있기는 한데, 일본처럼 정식으로 단체 세워서 만드는 게 아니라 그냥 팬카페 만들고 단관하거나 돈 모아서 조공하는 정도. --물론 선수가 못하면 가차없이 깐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일본프로야구의 선수 개인 스폰서는 KBO의 선수 팬클럽하고는 차원을 달리하는데 일단 스폰서로 나서는 사람들은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정재계의 유력자이나 유명인사들이고 이들이 선수들에게 주는 금일봉의 규모는 선수가 구단에게서 받는 연봉은 몽땅 저축하고 금일봉으로 받는 돈만 가지고도 생활비로 쓰고도 남는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이다.]하고 술마시러 다니기 바빴고 술자리에서 감독 뒷담화나 하는 게 일이었다. 이런 개인 스폰서들은 팀의 스타급 주력선수들뿐만 아니라 조금만 싹수가 보이면 유망주 시절부터 들러붙는데 그런 자리에서 아직 기량도 제대로 못 갖춘 주제에 감독 뒷담화나 하는 선수들의 비위나 맞추면서 맞장구를 치는데 열심이었고 또 이런 선수들의 스폰서가 이른바 슈퍼팬의 형태[* 참고로 노무라가 한신에 부임한 초기에 승승장구할 때 오사카의 한 귀금속점에서 순금으로 만든 노무라 감독상을 만들어서 팔았다. 당시 한국돈으로 수천만원이나 하는 물건이었는데 이런 걸 만든 것도 기가 막힐 판에 더 기가 막힌 건 이걸 진짜로 산 사람이 있었다는 것(...) 이런 걸 돈 주고 지르는 사람들이 이런 부류이다. 2020년에 [[코로나바이러스-19]] 사태에서 문제가 됐던, [[후지나미 신타로]]가 참석한 유흥 파티도 이런 스폰서가 연 것이다.]로 구단 프런트와도 친분관계를 맺고 구단에도 영향을 미치는 등 외부에서 초빙한 지장의 말이 먹힐 분위기가 아니었다. 한신의 고질적인 문제를 통감한 노무라가 물러나는 자리에서 구단주에게 '''"이 팀은 카리스마형 감독이 선수들의 기강부터 잡아야 제대로 굴러갈 것"'''이라면서 강력하게 추천한 후임이 철권제재의 대명사인 '''[[호시노 센이치]]'''였다. 호시노는 부임하자마자 선수들의 개인 스폰서들을 아예 구장 및 훈련장 근처에 접근도 하지 못하게 했으며 이런 스폰서들의 유혹을 못이기고 만년 유망주 수준에 머물렀던 어정쩡한 기량의 선수들을 대거 방출하는 것으로 개혁을 시작했다. 물론 이렇게 강하게 나오면 타성에 젖은 기존 선수들이 반발해서 팀 분위기가 더 시궁창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일단 자기에게 반기를 들면 어떻게 될지 몸소 행동으로 보여줬고 직전해까지 4년 연속 최하위에 "노무라 감독마저도 이 팀을 구할 수 없단 말인가"라는 위기의식에서 그 때까지 [[주니치 드래곤즈]]의 상징이었던 사람을 삼고초려까지 해서 모셔온 감독이라 철권통치에 감히 반기를 들만한 분위기가 아닌 덕분에 호시노의 개혁작업이 성공할 수 있었다.[* 정작 호시노 본인도 일본프로야구 후원회 문화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던 게, 2008년 베이징 올림픽때 요미우리의 [[이승엽]]에게 [[좆|X]]털린 직후 자기 후원회 모임에서 애꿎는 한국 징병제, 심판 탓을 했다(...).] * [[혈액형 성격설|혈액형과 선수의 실력에 관련이 있다는 것]]을 진지하게 믿는 듯하다. 일본웹에서 검색하면 이 사람의 혈액형에 관한 어록이 꽤 많이 나오는데, 대표적인 것은 'B型O型は一流選手になれるが、A型は1流になれない (B형과 O형은 일류선수가 될 수 있지만, A형은 1류가 될 수 없다)' * 타격 기록 1위였다가 2위로 밀려난 적이 많다. 출장경기(3,017), 안타(2,901), 홈런(657), 타점(1,988) 모두 2위다. 1963년 한 시즌 최다홈런(52개)를 기록했으나[* 이전 기록은 1950년에 기록한 코즈루 마코토(쇼지쿠 로빈스)의 51개였으며 노무라가 갱신 후 "내 기록은 10년 이상 깨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코즈루는 참고로 NPB 1시즌 최다 타점(161개) 기록 보유자다.] 1964년에 오 사다하루가 55개를 치며 갱신, 1973년 통산 최다 홈런 기록을 2주간 보유하고 있었으나 왕정치에게, 1978년에는 하룻밤 사이에 통산 최다 타점을 역시 왕정치에게, 통산 최다 안타를 [[장훈(야구선수)|장훈]]에게 타이틀을 내줬다. 노무라는 "나는 침착한 척했지만, 질투의 폭풍으로 마음이 격렬했다. 그래도 라이벌 왕정치가 있었기 때문에 매일 노력할 수 있었다."는 말을 남겼다. 장훈과 노무라도 호적수였으며 치열한 경쟁을 통해 기량을 향상할 수 있었다고 둘 다 밝히고 있다. 노무라는 의외로 나가시마를 라이벌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는 천재이고 그는 내가 노력할 적임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를 이길 수 없었어도 후회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 자신의 인생은 비록 늘 2등이었지만 괜찮다고 한다. 1975년 왕정치가 NPB 최초 600홈런을 먼저 기록했고 본인이 그 다음에 뒤따랐으며, 인기가 많은 [[센트럴 리그]]에서 왕정치와 나가시마는 늘 주목을 받고 인기가 없는 [[퍼시픽 리그]]에서 뛰는 본인은 야구기록을 갱신해도 그늘진 존재라고 느낀 경우가 많았다.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서 조용히 피는 노란 작은 꽃이 노무라의 고향인 [[교토]]에서 많이 폈는데 학생 시절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는 저녁에 꽃들을 봤던 기억을 떠올리며 본인의 모습과 겹친다고 생각했다. 매력적인 센트럴 리그가 아닌 퍼시픽 리그에서 열심히 뛰고 비록 관객수는 적을지언정 관객들을 위해 꽃이 피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 생각이 일본프로야구 생활을 뒷받침했다고 술회했다. * 세이부 시절이던 1980년 9월 28일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 1사 만루 동점 상황에서 노무라는 본인이 외야 희생플라이를 쳐서 주자를 불러들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으나 대타로 교체되었는데 대타는 땅볼 아웃(병살타)당하고 말았다. 게임이 끝나고 노무라는 "팀이 승리하지 못하고 실패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고 하며 그동안은 "항상 개인 성적보다는 팀의 승리가 먼저였으며 (난카이) 코치 때도 늘 이 점을 강조했는데 그것을 잊고 타자의 실패를 원했다"고 했으며 게임 다음날 프런트와 코칭스태프에 본인의 은퇴 의사를 밝혔고 시즌 종료 후 은퇴하였다. 팀의 승리는 개인의 성공 전에 절대이며, 그건을 잊는다면 끝났다고 강조하고 있다. * 코치는 선수에게 단순히 야구기술만 전수해줄 것이 아니라 사고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선수는 누군가의 지시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가지고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들을 개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코치는 선수들의 질문을 유도하게끔 하여 사고 기술을 알려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코치의 열성적인 지도도 선수는 흡수할 수 없다고 하며, 선수가 스스로 얻어낸 것들은 지도자가 가르치는 대답보다 여러번 확신할 수 있으며, 스스로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가르치지 않고 인도하는 것 그것이 지도자의 역할이다. * 노무라가 프로 3년차에 접어드는 봄에 난카이 호크스는 하와이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바로 지난 해에는 2군에서 뛰었지만 불펜 포수 역할로 1군에 합류했는데 하와이 도착 환영 파티에서 난카이 구단 대표가 훌라댄스를 추는 사진이 일본의 스포츠 신문에 실리자 난카이 본사는 분노했다. 선수들도 통행금지 시간을 어기고 놀러다니는 동안 노무라는 묵묵히 공을 받았고 연습 종료 후에는 사용된 공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또한 매일 밤 당시 감독인 [[츠루오카 카즈토]]의 방에 가서 "오늘은 충분하지 않았다"고 꼼꼼히 보고했다. 주전 포수였던 마쓰이 아츠시 대신 경기에 출전할 때 [[포수 리드]]를 잘했으며 전지훈련을 마치고 귀국하는 공항에서 츠루오카는 "이번 전지훈련에 대해 이야기할 게 없다"고 말하며 등을 돌렸지만 "노무라만 수확했다"고 회상했으며 이것이 노무라의 미래를 열였다. 츠루오카는 메이저리그 야구 전술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츠루오카의 '뇌야구'를 노무라는 철저히 배웠다. * 노무라는 감독 뿐만 아니라 책 집필도 많이 했다. 처음에는 야구팬들이 노무라의 책을 읽었지만, 점차 사업가, 기업인, 회사원들이 노무라의 책을 찾기 시작했다. 노무라의 야구 이론에 의하면 뛰어난 천재 선수들이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매우 평범한 선수들을 움직여 승리할 수 있는 길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즉, 평범한 직원으로 구성된 회사를 운영하는 총괄 매니저의 기업 경영에 쉽게 적용할 수 있었다. *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며 그것은 아무거나 칭찬하거나 친절하게 치료하는 사랑이 아니라 할 말을 똑바로 말하고 상대방을 가혹하게 대하고, 때로는 꾸짖는 것도 큰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비난과 칭찬이 종종 언어에 동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선수 앞에서 화부터 내는 건 금하고 있는데 분노는 지도자가 자신의 감정에 휩쓸려 통제 할 수 없다는 증거이며 개인의 감정과 욕망만으로는 선수를 양성하기에 충분하지 않으며, 팀은 더 강해질 수 없다고 말한다. 노무라가 난카이 현역 선수 시절 츠루오카 감독은 군대 생활을 경험한 사람이어서 늘 선수들에게 고함을 지르고 라이벌팀과 지속적으로 비교하는 게 일상이었으며 이런 날이 지속되면 라이벌에 대한 부러움 그리고 소속팀에 대한 반감이 자란다고 말한다. * 시장 경쟁에서 라이벌에게 이기려면 자신의 약점을 분석하고 강화하기 위한 전략을 채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야쿠르트 감독으로 부임하기 전 야쿠르트는 늘 하위권을 전전했으며, 야구는 상대방을 무득점으로 묶으면 승리하는 스포츠이기 때문에 팀 재건의 첫 방법으로 투수진 강화를 택했다. 이토 토모히토, 오카바야시 요이치, [[이시이 카즈히사]] 등 선발 투수진들을 키워냈고 야쿠르트가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1992년 드래프트 회의 당시 투수 이토 토모히토냐 타자 [[마쓰이 히데키]]냐를 고민했는데 야구는 투수라는 믿음이 있어 이토를 택했다. * 요즘 일부 코치들은 선수와 친구들만큼 가까운 것 같지만, 코치는 여전히 선수들에게 경외심을 심어야 한다. 즉, 당신은 무서운 지도자가 되어야 하며 지도자가 달콤한 말을 속삭이고 팀에 긴장감이 없을 때 그 팀은 끝났다고 말하며 이는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 포수 포지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투수가 [[퍼펙트 게임(야구)|퍼펙트 게임]]이나 [[완봉승]]을 달성하는 것도 포수의 힘이며 노무라가 현역 시절 승리 투수가 인터뷰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어보았다고 한다. 야구는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는 하지만 드라마의 시나리오 작가를 쓰는 사람들, 그가 바로 좋은 포수라고 말한다. 도루 저지 뿐만 아니라 전략의 계산, 타자의 심리 분석, 투수 리드 등 화려한 무대 뒤에서 포수는 역할을 수행하며 같은 포수인 [[모리 마사아키]]와도 생각을 공유했다. 특히 후배 포수들을 양성할 때 강조했던 점이 구종 사인을 하나하나 낼 때는 신중하게였다. 특히 포수는 타자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타자의 표정과 감정의 변화를 읽을 수 있어 포수는 항상 입을 다물었다가 오른쪽 눈으로는 캐칭한 미트를 보고 왼쪽 눈으로는 (우타석에 들어선) 타자의 표정을 보라고 지도했다. 투수를 알고 싶으면 포수를, 포수의 감각을 타격에 활용하고 싶다면 포수에 대해 알 것을 말한다. 이를 잘 소화한게 [[후루타 아츠야]]였다. 감독도 외야수보다는 내야수, 내야수보다는 포수 출신이 제격이며 야구가 점점 세밀하게 진화하는 시대에 포수는 작은 것까지 관찰하며 이에 반해 외야수는 대략적인 것만 보는 시야가 생긴다고 말한다. * 포수 시절 타자를 아래의 4가지 유형으로 정리하고 각 유형별 상대법에 대해 생각했다. > A. 패스트볼에 초점을 맞추면서 변화구에 대응하려고 하는 유형 > B. 인코스 또는 아웃코스와 같이 스트라이크 코스를 미리 결정하는 유형 > C. 타격 방향(좌익/우익)을 결정하는 유형 > D. 타자 각 개인이 가장 치기 좋아하는 공을 타격하는 유형 * 선수들의 적성과 능력, 문제점을 알아보고 적절한 위치에 배치하고 그 능력을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잘했기 때문에 "노무라 재생공장"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실제로 백업포수였던 이이다 테츠야의 빠른 발을 활용하기 위해 외야수로 전환시켰고(포수 겸임) 여러 포지션에서 활용할 수 있게 됐다. 포지션 변환과 같이 매우 중요한 변화를 말할 때 동기를 부여하는 단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예가 바로 구원투수로의 전환을 망설였던 에나츠에게 했던 말, "혁명"이었다. 난카이 감독에서 해임 후 현역 생활을 지속해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평론가인 구사나기 다이조(Daizo Kusanagi)가 "노무라 당신은 아직 젊다. 인간은 평생 학생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는 말에 감명을 받고 "평생포수"라는 단어를 늘 품에 안고 살았다고 한다. * 꿈과 희망이 없다면 사람은 둔감해지며 요즘 야구선수들을 보면 플레이에 너무 의욕이 없다고 느낀다고 하다. 특히 불감증을 싫어했는데 감독 당시 의도적으로 벤치 앞에 공을 흘려두면 수비에서 돌아온 선수들 중에 공을 줍는 선수가 있고 공을 그대로 두고 지나가는 선수도 있으며 후자의 경우 야구에 대한 태도가 없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쓸모가 없다고 꼬집고 있다. 코치도 꿈과 철학을 갖고 선수들을 정면으로 대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어렸을 때 가난으로 고생하여 부자가 되어 어머니를 편하게 모시고 싶다는 생각을 해서 가수나 영화배우가 되려고 했으나 꿈을 접었고 결국 그에게 남은건 야구였다. 야구에도 도구 구입비가 들어서 도구를 사달라고 할 수 없었고 중학교 야구부 단체사진을 보면 한 명만 유니폼을 입지 않았는데 그게 노무라였다. 노무라는 후배의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갔다고 한다.[* 홀어머니 가정에서 가난과 싸우며 성공한 점은 [[장훈(야구선수)|장훈]], [[도이 마사히로]]와 동일하다. 고생하는 어머님을 편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이들에게 강했으며 그런 생각이 프로에서의 성공 밑바탕이 됐다. ] * 어린시절 가난하게 자랐기에 그에 대한 반발심으로 명품수집을 취미로 하고 있다. 주로 수집하는 품목은 베르사체의 넥타이와 시계로 넥타이가 약 400개 시계가 수십개에 다다랐지만 야쿠르트 감독시절 도둑을 맞아 시계를 모두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꾸준히 모으고 있다는 듯. 현역 시절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모리 마사아키]]가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일본시리즈를 앞두고 전력 분석 차, 한큐와 같은 퍼시픽 리그 소속인 난카이의 노무라를 찾아와 밤새 야구를 이야기를 나눈 뒤 노무라의 양복을 꼭 한 벌씩 가져갔다고 한다.[* 구두쇠 모리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절약을 잘했는데 절약에 관한 일화는 모리 마사아키 문서 참조.] * 생전에 [[조지마 겐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그에게 '''"넌 일단 인간부터 되거라."'''란 소리까지 할 정도로 매우 사이가 나쁘다. 이유인 즉슨, WBC 1라운드 당시, 일본이 한국에 0:1로 밀리자 노무라 감독은 조지마의 볼배합 문제를 지적는데, 이에 조지마는 "그러는 감독님은 선수생활 할 때 한 번도 실점 안 하셨나 보네?"라며 곧바로 직격탄을 날려 버린 것이다. 결국 이 이후부터는 서로 얼굴조차 마주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노무라 카츠야]]는 포수로써의 실력은 조지마보다 [[호소카와 토루]]가 더 뛰어나다는 발언까지 한 적도 있다. 호소카와도 수비력은 매우 좋지만 [[사토자키 토모야]]에게 국대 백업포수 경쟁에서 밀려 국가대표 승선 경험이 없는 걸 감안하면 명백하게 조지마가 싫어서 호소카와를 밀어주는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